하늘나라 편지

+ 천국편지 / 우주에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방 & 무고한 자가 죄책감을 느끼느냐?

+ 쉬 리 + 2017. 11. 5. 22:23

 

 

 

천국편지 / 우주에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방


우주에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방

Room for All in the Universe


Heavenletter #6188. - God

Published on: November 3, 2017

http://heavenletters.org/room-for-all-in-the-universe.html


 

 

 

신이 말했다.


정말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비록 그렇다 해도, 단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으며, 우주에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충분한 방이 있다. 실로, 너희들이, 모든 나의 어린이들이 그 우주이다.


세상에서는 배제가 일어나며, 그것이 너희에게 일어났다. 이것이 또한 여관 주인에게 일어났는데, 그는 다른 이들을 그의 여관으로부터 당연히 배제하고 있었다. 제한된 앎이 그를 접수했다. 불리한 결정이 만들어졌고, 불리한 결정은 틀림없이 지불의 고려에 기초했는데, 마치 인간 존재의 가치가 동전에 묶여있다는 듯이 말이다. 하나의 잘못이 영혼의 고려 없이, 그리고 사랑이 있다는 나의 의지에 고려 없이 만들어졌다.


이제 부디, 친애하는 사업가여, 내가 여관 주인이 그의 현실로 보이는 사업적 필요성들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왜 그런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 순간도 생각지 마라. 거기 여관 주인이 그의 방문자가 누구인지를 몰랐던 그 슬픔이 놓여 있다. 그는 그의 방문자가 또한 그 자신이었음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나Uni는 하나One를 의미한다. 운문verse은 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려될 수 있다. 그런 다음 우주는 하나의 세계를, 한 줄의 시를 의미한다. 우주를 부르는 하나의 노래라고 고려해라. 그것은 실로 내가 끝없이 부르는 하나됨Oneness의 오래이다.


이제 모든 이가 그가 또한 크고 명확하게 하나됨Oneness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라는 앎으로 자라고 있다.


나는 우주가 된 하나의 소리를 만들었고, 너는 지금 삶의 이 튀어오르는 공위에서, 혹은 코바늘로 짜이거나 뜨개질되기를 기다리는 풀린 털실 공위에서 - 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데 - 삶을 살고 있는 너 자신을 발견하는데, 그리하여 너무나 단단히 감긴 것으로부터 그 자신을 풀면서 말이다.


삶은 실로 네가 감는, 네가 시계를, 날들을 감곤 하던 식으로 감는 하나의 이야기인데, 시계들, 해시계들, 그리고 모래로 채워진 그 에그 타이머[계란 삶을 때 쓰는 타이머]를 거꾸로 뒤집을 때 — 태양 그 자체를 따랐던 그 낡은 양식의 비-존재의 시간을 뒤집을 때 말이다.


자아진 황금Spun Gold으로 시작한 세계가 추위cold로부터 시간과 공간을 받아들였고, 시간과 공간이 그들이 의지하는 대로 흩어졌다. 공간과 시간에 대한 관심과 믿음이 그것들이 복음으로 받아들여질 때까지 커졌다.


삶이 낮에 태양에 의해 가고, 밤에 별들에 의해 갈 때, 모터들이 힘을 받고 문들이 쾅 닫히기 전에, 삶은 얼마나 단순한가.


여관은 만원인 듯 보였다.


공간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때, 그것의 고갈이 없다. 그러나 공간이 믿어졌고 축적되었다. 하나됨Oneness이 소유되었고, 둘로, 너와 다른 이로 나눠졌으며 – 그리고 모든 비-존재의 시간 동안 또 다른 이로, 또 다른 이로 나눠졌다.


하나됨Oneness의 간결성이 둘로 나눠졌다. 다른 것의 부분들이 지구상에 살게 되었고, 하나의 지구가 지금 측정되고, 조각들로 나누어졌다. 분리가 고양되었다. 인간이 흐트러졌다.


내게 더 가까이 오라, 너와 나는 하나됨Oneness 속에 다시 결합할 것이다. 너는 진실을 되찾을 것이다. 이기심이 간단히 없어질 것이다. 사랑이 지배할 것이다. 공간이 없을 때, 그 어디도 없으며, 그러나 하나의 가슴이 비-존재의non-existent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재결합할 것이다. 이 재결합이 문제된다. 그것이 너에게 문제된다. 너는 너의 모든 생애 동안 이 결합을 찾아왔는데, 네가 결합이 가능하다고 거의 생각지 않았을 때에도, 혹은 네가 심지어 그 생각을 비웃었을 때에도 말이다.


같은 비-존재의 시간에, 언제가 없다. 또한 공간이 없다. 그러므로 있을 어딘가가 없다. 이제 그것이 우리를 어디에 남기는가?


무한Infinity 속이며, 물론 빛나는 무한한 하나됨 속이다. 우리들의 하나가 하나됨Oneness으로 변두리까지 채워지게 해라. 진정한 하나됨, 휘몰아치는 눈처럼 순수한 하나됨, 지각된 장애물이 없는 하나됨, 가짜의 차이점들이 없는 하나됨 -- 하나됨의 오직 단순한 앎, 우주가 흘러넘치게 채우는 하나됨 말이다.


하나됨Oneness의 나의 아이는 제한이 없다. 열림은 확장이다. 그어진 선들이 없다. 회복할 선들이 없고, 지울 선들도 없다. 하나됨Oneness이 있다.




무고한 자가 죄책감을 느끼느냐?

 

무고한 자가 죄책감을 느끼느냐?

Are the Innocent to Feel Guilty?


Heavenletter #6189. - God

Published on: November 4, 2017

http://heavenletters.org/are-the-innocent-to-feel-guilty.html



신이 말했다.


너는 하나의 전환점에 있다. 이것은 그것이 매일 있는 방식이다. 모든 단일한 날에 너는 선택들을 만들고 있다. 모든 단일한 날에, 너는 이런 저린 방향에서 간다. 물론 네가 너의 성큼 걸음 속에서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좋다.


모든 매 선택은 의미들을 가진다.


가능하게, 오늘 아침에 들어갈 어느 커피숍에 대한 너의 선택은 너의 삶에 의미들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헤이, 네가 알아낼 수 없는 선택들이 있고, 너는 운에 맡겨야만 한다. 너는 지나치게 결정들에 거주할 수 없거나, 너는 너의 삶이 네가 그것을 사는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숙고할 수 있다.


너는 시간에 앞서 어느 커피숍에서 네가 너 자신의 진짜 사랑을 발견할 것인지, 아니면 어느 영화사에 의해 발탁될 것인지, 그래서 너의 전 인생이 바뀔지 — 아니면 아닐지를 알 수 없다.


어떻게 삶이 알아내질 수 있는가? 보증서가 없다.


사실 후에도, 너는 전체 이야기가 정말로 무엇인지의 의미를 항상 확실히 알 수 없다. 심지어 진짜 잘못도 잘못이 아닌데, 네가 삶의 체험을 얻기 때문이다.


큰 차이점이 있든 없든, 결정의 순간에, 심지어 회고시에도 —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만약 네가 다른 길을 택했다면, 너는 그 길이 더 좋았을는지, 아니면 더 나빴을런지를 알지 못한다. 다시금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것으로 오며, 무엇이 있었을 수 있는지를 의문한다. 그것이 모두 어쨌든 운명이었는가?


왕의 아기(아들)가 자라서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어머니와 결혼한다고 예언되었던 그리스 신화를 기억해봐라. 이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취해진 모든 수단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방지되지 않았다. 그 아기는 죽도록 산 위에 남겨지게 보내졌지만, 그 일을 맡은 한 친절한 가슴의 군인이 아기를 또 다른 왕과 여왕에게 그들 자신의 아이로 기르도록 주었다


소년이 성인이 될 때, 신탁들이 그에게 이 오래전의 예언을 말한다. 이제 이 예언을 알고, 예언으로부터 달아나려는 그의 욕망에서 오이디푸스는 그의 부모로 믿었던 왕과 여왕으로부터 달아나는데 — 너는 가끔 신탁이 없었으면 하고 바랄 수 있지 않겠는가?


어린 왕자가 그의 운명으로부터 멀리 달아날 때 – 그가 그의 운명으로부터 달아나는 길 위에 있다고 믿으면서 – 그와 한 늙은 남자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고, 따라서 젊은 남자, 오이디푸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 예언을 성취하면서 그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다. 그의 운명을 피함으로써 선을 찾았던 오이디푸스가 그 예언이 성취되는 곳으로 곧장 가는 그 길을 택했음이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이제 오이디푸스는 기쁜 마음으로 죽은 왕의 왕관과 그 왕의 과부 – 그에게 알지 못했던 – 그의 진짜 어머니, 조카스타Jocasta의 결혼의 승낙을 받는다. 그리하여 진심으로 좋은 뉴스로 보인 것에서 — 이제, 네가 잘못될 수 있다.


물론, 그 당시에 오이디푸스는 무엇이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삶에서 무고한 자가 죄책감을 느끼는가? 오이디푸스가 죄가 있는가? 그리스 신화, 프로이드, 외부의 세계는 그렇다고, 오이디푸스가 죄가 있다고 말하는 듯 보인다.


프로이드는 인간 존재들이 그들의 잠재의식을 따르고 있다고, 그러므로 상관없이 죄책감을 지닌다는 아이디어를 소개했다. 따라서 그렇다면, 세계는 우렁찬 예스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너의 어개를 으쓱이고, 나아가라


그 이야기를 끝내자면, 몇 년이 지난 나중에, 오이디푸스의 아내이자 어머니는 그녀가 그녀 자신의 아들과 결혼했을 뿐 아니라, 그녀의 남편의 살인자와 결혼했음을 발견하고, 그녀 자신의 목을 매단다.


그리고 오이디푸스는 그 자신을 장님으로 만든다.


너는 낮은 죄책감의 개념을 위해 그처럼 높은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고 정말로 생각하느냐? 나는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 존재는 모든 양식의 일들이 무고한 자에게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는 장소와 시간인 세계 안에 살아있는 한 인간으로 존재하는데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번역출처: AH.Korea http://www.abundanthopekorea.net/board2_3/10906 신의 편지/1509